일연 선생은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 1905~1950) 선생은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다. 예산 신례원 용곡리에서 태어나 18세까지 고향에서 권덕규 선생에게서 한학(漢學 = 유학)을 지도 받으며 신학문과 세계정세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하던 일연 선생은 19세(1924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서기로 근무하고 상해노동대학에 다니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쌓았다. 노동대학을 마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원으로서 독립을 위해 애쓰던 일연 선생은, 1930년 초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합덕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최석영 동지(同志 - 뜻을 같이하는 사람)와 함께 일제가 쌀을 공출(供出 - 강제로 살을 걷어감)할 때 발행하는 환증(=증명서, 은행에서 돈으로 바꿀 수 있음)을 위조(僞造 - 가짜로 만듦)하여 예산과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거금 8만 5천원(현재 돈으로 20억원 이상)을 인출(引出 - 돈을 찾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탈출하여 일부를 독립 운동 조직에 주고, 권총을 구입한 후 텐진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려 준비하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국내부터 쫓아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일연 선생은 국내로 잡혀와서 4년 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충남 아산 선장면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는 등 농촌 개발에 앞장섰으며, 1940년대에는 공주로 집을 옮기고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당시 일제 고등경찰은 일연 선생을 감시하기 위해 친일 경찰 앞잡이를 붙여 두었는데, 일연 선생은 오히려 그를 설득시켜 독립운동의 동지로 만들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심산 김창숙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의 판공실장(비서)이 되어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김구 선생과 함께 ‘3의사 봉안 위원회’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하다 일본에서 돌아가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까지 가서 노력한 끝에 찾아 모셔와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임명되어 친일파들을 잡아서 법정에 넘겨 재판을 받게 만드는 일에 옴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연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들을 모두 풀어주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일연 선생은 젊었을 때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과격한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김구 선생과 뜻을 같이 하는 우익(右翼 - 힘과 능력과 경쟁을 평등보다 중요시하는 정치 세력)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해방 후에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하면서 이범석 장군이 만든 우익 단체 대한청년단에 들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950년에 공주에서 대한청년단 공주군 단장으로 2대 민의원(현재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남북협상파는 공산당”이라는 극우(極右 - 힘과 능력과 경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정치 세력) 세력의 거짓 선전 때문에 낙선(落選 - 선거에서 떨어짐)한 후, 같은 해 6·25사변이 일어나자 공주에서 공산당에게 잡혀서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공산군이 퇴각하던 9월 초에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다른 이들과 함께 공산당에게 학살(虐殺 - 함부로 죽임)당하였다.
가족들은 선생의 시신(屍身=시체)도 못 찾고 대전교도소로 잡혀갔던 음력 8월 14일을 선생의 기일(忌日 - 돌아가신 날)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후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의 주도로 ‘일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서 1975년 6월에 고향인 예산 신례원 용곡산 자락의 묘지 주변에 추모비와 일연각을 세워서 항일 독립운동과 친일파 처벌,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일연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일연 선생과 관련된 기록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 거행>
- 동아일보 1946년 07월 07일 기사 -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열사의 국민장(國民葬 - 국민의 이름으로 지내는 장례식)은 7일 서울의 성지 효창공원에서 많은 독립 운동가와 정치인과 시민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먼저 애국가를 합창하고 이강훈의 개회사가 있은 후 음악이 끝나자 조완구가 3의사를 추모(追慕 - 돌아가신 분의 뜻을 기림)하는 글을 낭독하고 분향(焚香 - 향불을 피움)한 다음 신현상이 목메이는 소리로 제문(祭文 - 제사 지낼 때 읽는 글)을 낭독하고 이어서 유가족과 김구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제문 낭독이 있은 후, 오후 3시가 넘어서 무덤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이 날의 장례를 조상(弔喪 - 죽음을 슬퍼함)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에 모였고 국민장의 행렬은 오전 10시 3의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음악에 맞춰 효창공원으로 향하였다. 태극기를 선두로 소년군악대 각 정당 단체 화환과 조기(弔旗 - 슬픈 날에 거는 깃발) 그 뒤에 무장경찰대가 경호하고 남학생들이 앞을 인도하고 여학생들이 뒤를 따르는 태극기로 싼 흰 영구차는 소리 없이 굴러갔다.
이와 같이 3의사의 영정(影幀 - 돌아가신 분의 사진)과 영구(靈柩 - 돌아가신 분의 유해를 모신 관)를 모길가에 늘어서서 맞이하는 시민들의 가슴을 한층 더 뭉클하게 하는 것은 윤봉길 의사의 나무 형틀이었다. ... ... 3의사의 유골을 받든 김구 선생의 얼굴에는 새로운 느낌이 깊이 우러나오는 듯 하였다.
<호서은행 사건에 대한 최석영의 기억>
- 1975년 6월 최석영 회고록 / 2005.3.14. 무한정보신문 기사 -
... ... 20대에 일연 신현상 동지를 만나 우연히 알게 되자, 평소 한복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민족 주체 의식이 강한 점과 성격상 과격하고 활발하고 박력을 지닌 청년으로서, 왜놈 치하의 당시 사회로서는 아까운 청년으로 인식되어 상하이 망명을 권유한바 있었다. 원래 수완이 비상한지라 도중에 성공하고 2~3년 후에 귀국하여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때 나는 당진, 합덕, 삽교, 예산, 신례원, 선장 등 각지에서 정미업을 하고 있었으나, 왜놈들이 우리 기업을 육성하여 줄 리가 없었다.
그 때 일연이 상하이에서 구국 독립 운동가들이 자금이 부족하여 활동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정을 말하며, 군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고민하기에 같이 연구한 끝에, 절대로 우리 국민에게는 피해를 입지 않고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자금을 인출하자는 원칙을 세우고 우선 천안, 예산, 광천 등 은행을 상대로 자금을 인출하기로 하였다.
먼저 지역별로 10만원(당시 쌀 한가마 8원)해당의 환증(換證)을 위조 인출키로 하여 천안의 유명한 인장(印章=도장) 조각가 석모씨를 매수, 인장 위조 후에 서울에서 2개월에 걸쳐 원본과 꼭 같은 환증을 인쇄하여, 이를 이용하여 예산 호서은행에서 돈을 인출코자 하였으나, 은행 총 보유액이 5만 원밖에 없어서 이 금액 전액을 인출하고 잔액은 천안 호서은행에서 인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930년 3월 5일 일연 신현상과 정완희와 함께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함흥에서 차고동 동지와 합류, 중국 베이징에 도착하여, 유기석 동지와 접선하여 자금 일부를 전달하고, 6연발식 권총 2상자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때 나 자신은 따라만 갔었으나, 나중에 보니 이미 치밀한 계획 하에 일연 동지가 동지들을 만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일연 신현상 동지의 대담한 성격, 불타오르듯 하던 애국심이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