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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얼 계승

일우 김한종 의사는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 1883 ~ 1921) 의사께서는 1883년 1월 14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김녕(金寧) 김씨 집안의 유학자였던 김재정 선생과 광주 안씨 부인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6대 조상 김치화와 7대 조상 김방언은 효행이 지극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효자정문을 받았는데, 김한종 의사는 이러한 충효 집안의 자손이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당당하여 항상 바른 길을 가고자 애썼다. 아버지 김재정과 작은 아버지 김재풍으로부터 유학을 배우면서 바른 삶의 의지를 길렀는데, 성리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혁신 유학’의 길을 걸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본의 식민 지배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자, 부친 김재정은 1906년에 민종식, 김복한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홍주의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때 김한종 의사도 부친과 같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910년 강제로 한일병합이 되고 일제의 악독한 ‘헌병경찰통치’가 시행되던 1916년 김한종 의사는 당시 데라우찌 조선 총독이 충남 부여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철영, 우덕상, 김재창 등 동지들과 더불어 데라우찌를 사살하여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우 김한종 의사

이를 위하여 동지 우덕상을 중국의 장춘 지방으로 보내서 권총 2정과 실탄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의사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이 의사 집을 수색하는 바람에 의사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은 모두 피신하셨다. 김한종 의사는 이때 경상도에서 박상진, 채기중 선생 등이 이미 1915년부터 독립군 단체(대한 광복단)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경상도로 피신하였다.

  의사는 1917년 4월 채기중을 만나 경주로 가서 의병대장 허위 선생의 제자인 박상진을 만났다.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의사는 뜻을 모아서 ‘대한 광복단’을 ‘광복회’로 바꾸고, 널리 동지를 모집하였다. 광복회는 같은해 7월 대보름날에 시회(詩會 - 시를 짓는 모임)를 가장하여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박상진, 채기중, 장두환, 유창순, 김좌진, 노백린, 김경태, 김재창, 김재풍 등 전국에서 비밀리에 모인 200여 애국지사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맹서하고, 조직의 이름을 ‘대한 광복회’로 바꾸었다.

  “우리는 대한의 광복(光復 - 빛을 다시 찾음, 즉 독립함)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바침은 물론, 우리의 일생에 목적을 이루지 못할 시엔 자손들이 계속 이어서 적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어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절대 변치 않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하늘에 맹서함.”

  대한 광복회는 무력(武力)으로 일본과 싸워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독립하면 공화정(국민의 대표를 뽑아서 하는 정치)을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으며, 홍주(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을 만주에 보내어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워서 독립군을 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군자금(軍資金 - 군대 양성에 필요한 돈)을 보내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 광복회의 충청도지부장을 맡은 김한종 의사는 고향 광시 신흥리로 돌아와서 대대로 집안에 내려오던 농토 등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괴산군 칠성면 두천리, 인천 마두정, 경북, 서울 등에 비밀 연락소를 설치하고 국내외 동지들과 연락하였다. 또한 전국의 부호(富戶 - 부자) 160여 명에게 ‘독립군비 분담 통고문(獨立軍費 分擔 通告文 - 독립군에 필요한 돈을 나누어서 내라는 글)’을 만들어 보낸 후, 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거둬서 많은 군자금을 마련하여 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에게 보내주었다.

  또한 악질 친일 행위를 하거나 대한 광복회의 활동을 일본 경찰에게 고발한 경상북도 칠곡의 친일파 부호 장승원을 1917년 11월에 동지들을 보내 권총으로 처단(處斷 - 죽임)하고, 1918년 1월에는 충청남도 아산 도고의 친일파 면장 박용하에 대한 ‘사형선고문’을 작성하고 김경태와 임세규 등 통지들을 보내서 역시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대한광복회 회의모습

1919년 3 ․ 1운동 때 4,000여 시위군중이 광시면사무소 앞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이러한 의사의 활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강력한 활동은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배신자 이종국의 밀고(密告)로 조직이 발각되어 핵심 인물들이 1918년 1월에 거의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당한 37명 중 24명이 충청도지부원이었다. 체포된 인물 중에서 충청도지부원인 김한종, 김경태, 유창순, 장두환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광시 신흥리 일우 김한종 의사의 고향: 앞쪽이 사당, 뒤 왼쪽의 초가집이 생가, 오른쪽 콘크리트 건물이 기념관이다.

김경태는 경성에서 사형이 집행됐으나 유창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10년, 장두환은 7년형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장두환은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28세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한종과 박상진은 상고(上告)했지만 역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1일(음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머지 동지 28인은 1년에서 10년의 형을 받았고, 잡히지 않은 분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및 암살단, 대동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결하여 1920까지 대한 광복회의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한종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 - 나라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시거나 목숨을 바친 분에게 나라에서 벼슬이나 상을 드리는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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