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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얼 계승

면암 선생은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순조 33년(1833) 12월 경기도 포천에서 아버지 최대(崔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당시 정통 유학(성리학)자로서 대표적 위정척사파였던 이항로(李恒老)의 제자가 되어 면암(勉庵 - 최선을 다해 삶)이란 호(號)를 받았고, 철종 6년(1855,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사헌부장령을 맡았던 고종 5년(1868, 36세)에 ‘시폐 4조(時弊四條)’상소를 올려 무리한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를 혼란시킨 흥선 대원군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관직을 삭탈(削奪 - 자리에서 쫓겨남)당했다.

  1871년(39세)에 신미양요(辛未洋擾 - 미국이 강화도로 쳐들어온 난리)가 일어나가 외적과 싸우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다가, 난리가 끝나자 포천으로 돌아갔다. 41세 때 다시 동부승지에 복직되자「오조대의(五條大義)」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잘못을 다시 비판함으로써, 대원군을 섭정(攝政) -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함) 10년 만에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 때문에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면암 최익현 사진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 들어와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면암은 「오불가척화(五不可斥和)」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에서 면암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 - 일본과 서양이 똑같이 나쁜 놈들)’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때에는 병이 심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농민군을 비판했으며, 1895년(63세)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하자, 면암은「오두가단 발불가단(吾頭可斷 髮不可斷)」을 부르짖고 반대하면서 의병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하였다.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종은 이를 달래기 위하여 유림의 존경을 받던 면암을 앞세워 수습하려고 관직을 내리지만, 면암은 이를 사양하고 오히려 의병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을미사변의 주동자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 35년(1898) 66세 때는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사직(辭職 - 자리에서 물러남)을 불허(不許)하자 면암은「시무 12조(時務12條)」를 올려 당시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힘써야 할 일들을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종 37년(1900) 4월 면암은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의 유림(儒林 - 유학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현재의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로 이주하여 뜻있는 유림들과 국난 극복 방안을 논의하였다. 1905년 러 ·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내정간섭을 심하게 하자, 면암은 「5조 시무책」을 올리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다가 두 번이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협박을 당하고 풀려났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면암은 조약의 불법성을 규탄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협력한 을사 5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를 처벌하자는「청토5적」상소를 올렸다. 그해 12월,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팔도의 백성이 봉기하여 싸우자는「포고팔도사민」을 발표하고, 1906년 4월(음력)에 임병찬 등과 함께 전라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고종에게「창의토적」상소를 올리고, 일본의 16가지 죄를 꾸짓는「기일본정부」라는 글을 일본 공사관에 보낸 후에 전라도 정읍, 순창, 곡성 지역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200여명으로 순창과 태인, 정읍을 점령한 면암의 의병은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이때 각지에서 의병이 더 모여들어 그 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전주의 경찰대를 물리치고, 곡성에 들어가 일제가 설치한 기관을 철거한 후 순창으로 돌아오자 의병 수가 1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강해졌다. 이때 면암은 가능한 피를 흘리지 않고 의병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관군을 물리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6월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고종 임금의 이름으로 된 글을 보내어 해산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면암은 동족인 관군과 계속 싸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적극적으로 싸우기를 망설였다. 이로 인해 의병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이 틈을 타서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가 면암의 의병을 기습하여 많은 의병이 전사(戰死)하였고, 면암은 임병찬, 고석진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병의 모습(광복회 홈페이지) 사진

  수차례의 재판을 받은 후, 1906년 7월에 임병찬과 함께 일본 쓰시마섬(대마도)로 압송되어 감금생활 4개월 동안 단식(斷食) 투쟁 끝에 고종 황제께 올리는 마지막 상소를 남기고 1906년 11월 17일 옥중에서 순절(殉節)했다. 시신을 담은 관이 부산 초량나루에 닿자 부산 시민들은 사흘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슬퍼하였다. 처음에 면암의 묘소를 현재의 충남 논산군 노성면 큰 길 가에 만들었으나,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자, 일제가 1910년에 강제로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移葬 - 묘를 옮김)하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비록 정통 성리학자(위정척사파)로서 개화(開化 -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바꿈)라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는 못하였으나, 곧고 바른 선비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면서 잘못 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의인(義人)이었다.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최익현 선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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