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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얼 계승

수당 선생은

수당 이남규 선생(李南珪, 1855∼1907)은 1855년 서울 미동에서 이호직과 청송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수당은 21살이 되던 1875년,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882년에 대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로 들어섰다. 관직을 맡아서는 항상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고, 특히 영흥부사를 맡았을 때에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하였다. 올바르게 백성을 위하는 수당의 이런 훌륭한 성품은 곧 온 나라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1896년에 수당이 안동관찰사로 부임할 때에는 관리에 대한 불신감이 컸던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어났던) 안동 지역 의병들까지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크게 반겼다. 한편, 수당은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고, 마침내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어 고종 임금을 가까이서 모셨다.

  그러나 수당 선생이 관직에 오르고 난 후 나라의 상황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일본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자 선생은 그때마다 일본을 꾸짖으며,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정통 유학(성리학)자로서 위정척사(衛正斥邪 - 바른 것, 즉 성리학을 지키고, 나쁜 것, 즉 서양이나 일본 것을 몰아내자) 사상가였던 그는 1895년 을미사변 후 단발령(斷髮令 - 상투를 치고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발표되자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르지는 못하겠다.’는 내용의 상소로 항의하였으며, 이후에도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하고자 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수당 이남규 사진

  1905년 일제(日帝)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을 집어삼키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예산과 청양, 홍주(홍성)에서 민종식이 주도한 의병 ‘홍주의병’이 크게 일어나자 수당 선생은 군사와 군량미를 보급하는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였다. 그리고 홍주성을 일시 점령했던 민종식 의병장이 일본군에게 쫓기게 되었을 때, 수당은 기꺼이 자신의 집 사랑채인 평원전에 그를 숨겨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수당은 맏아들 충구와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수당 부자는 호된 문초에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일본 군경을 꾸짖는 등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수당 선생이 다시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는 일에 가담하자, 수당이 충청도에 있는 한 의병 운동을 잠재울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1907년 8월 19일(음) 수당 선생의 집에 들이닥쳐 선생을 묶어서 끌어가려 하였다. 이에 수당은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며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수당이 탄 가마가 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은 길을 멈추게 하고 다시 수당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수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일본군을 꾸짖었다. 마침내 수당의 뜻을 꺾는 것을 포기한 일본군이 수당 선생을 죽이려고 칼을 빼들자 부친을 모시고 가던 맏아들 이충구가 황급히 아버지 앞을 막아섰고 가마를 메고 가던 머슴 김응길, 가수복 또한 온몸으로 주인을 지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수당은 아들 이충구, 가마꾼 김응길과 함께 무자비한 일제의 칼날에 장렬한 최후를 맞아 순절(殉節 - 나라를 위해 죽음)하였다.

수당 기념관

수당 선생 순국 기념비 : 아산시

<수당고택> : 왼쪽이 사랑채인 평원정이고, 오른쪽이 안채이다.

수당 가문은

수당 가문은-구분, 애국지사, 주요업적
구분 애국지사 주요업적
2대(아들) 이충구
  • 예산 대술면 상항리 출생
  • 수당의 장남으로 의병활동에 참가
  • 1907년 - 이남규와 함께 아산 평촌에서 순국
  • 1991년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追敍)
3대(손자) 이승복
  • 13세 때 일본군에게 부친을 잃음
  • 연해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전개
  • 1922~1927년 - 귀국 후 언론 활동, 신간회에 가담
  • 1990년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4대(증손) 이장원
  • 1950년 -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
  • 1951년 - 6.25 전쟁 때 원산 전투에서 전사
  • 1953년 - 충무무공훈장 추서
가마꾼 김응길
  • 1907년 - 수당선생과 함께 순국
  • 2008년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다. 수당고택은

  수당고택은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81호로 수당 선생의 생가(生家)이다. 수당 선생의 12대 조상 아계 이산해의 손자 이구(李久)가 젊은 나이로 요절(夭折 - 젊어서 죽음)하자 부인 전주이씨(1588~1668)가 1637년(인조 15년) 아계의 묘소 근처인 이곳에 지었고, 1864년(헌종 12년) 다시 고쳐서 지었다고 한다. 남향집으로 ' ㅡ ' 자형의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과 ' 튼 ㅁ' 자형의 안채가 있고 모두 5량(樑)의 굴도리 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채의 좌측 끝은 맞배지붕이고, 대청마루 전면엔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겹처마로 처리했다. 대청 좌측에는 1칸씩의 마루방과 건넌방이 있고 이어서 2칸의 부엌이 연결되는데, 조상께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을 바깥에 따로 두지 않고, 대청마루의 서측 끝 1칸 반을 우물마루로 만들어 사당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안채의 입구에 있는 一자형의 행랑채는 2칸의 중문을 중심으로 동측 3칸에는 헛간을 드렸고 서측 2칸은 청지기방으로 꾸몄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위쪽은 둥그런 반월형이며, 여닫을 때 “삐이꺽”하는 소리가 나는 전형적인 전통 주택의 대문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되어 그 규모가 매우 크다. 대청이 2칸을 차지하고 있는데 전면에는 4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문을 달았고 후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수당고택의 전체적인 특징은 우선 집의 안주인 여성을 중심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즉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있다는 것과, 대문의 모양이 여성스런 점, 사당을 안채에 두어서 밖에 나가지 않고도 편리하게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 점, 안채로 통하는 문을 2중으로 만들어서 안채의 모습을 함부로 볼 수 없게 한 점 등이 그것이다. 또한 따로 담을 쌓지 않고 주변 환경과 집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는 점도 다른 양반 주택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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